지금 하는 일을 소개해 주세요.
올해 초 대학원 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는 기업의 연구원으로 분자 시뮬레이션 파트를 담당하고 있어요.
분자 시뮬레이션이란 개념 자체가 좀 생소한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보통 화학 분야 연구자라고 하면 흰 가운을 입고 실험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잖아요. 저는 화학물질들의 특성을 AI 기반으로 계산, 예측하는 작업을 주로 해요. 재료 스크리닝(screening)이라 부르기도 하죠. 신소재를 개발할 때 수많은 후보 물질이 있는데, 과거에는 이걸 사람이 일일이 확인해야 했어요. 에디슨이 전구 필라멘트 재료로 텅스텐이 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 실험을 수천 번 한 것처럼요. 제가 하는 일은 이러한 실험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하도록 돕는 일이예요.
마치 연금술사가 하는 일처럼 들리네요.
보통 시뮬레이션을 표현할 때 ‘과학 현상의 불완전한 모방’이라고 해요. 실제 실험 결과와 100% 일치시키기 어렵기 때문에요. ‘이렇게 재료를 만들면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습니다’라고 정답을 내는 일은 할 수 없는 거죠. 만약 그게 가능해지면 재료 과학의 성배(聖杯)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가 하는 일로 1만 개의 후보 물질 중 실험해 볼 가치가 있는 100개를 의미 있게 추려 실험 기간이나 비용을 줄이거나, 재료를 조합해 특정 성능이 발견됐을 때 그에 대한 이론적인 해석을 내놓을 수는 있죠.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뭔가 멋있게 얘기할 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렇진 않아요. 저는 소위 말하는 똥손인데요, (웃음) 화학은 분야 특성상 실험이 많잖아요.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실험으로 대성하긴 어렵겠다고 일찍부터 생각했죠. 어떻게 하면 실험 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알아 보던 차에 계산 화학이라는 분야를 접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실험도 피할 수 있었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실험복 입고 실험실에 들어간 게 한 7년 전이네요.
기업 소속 연구원으로서의 생활은 만족스럽게 하고 있나요?
박사 과정 마칠 즈음 이런 고민을 했어요. ‘내 기술을 어디에 쓸 수 있지?’, ‘이 기술로 돈을 벌 수 있을까?” 학계나 국책 연구소가 아닌 기업 취직으로 커리어 방향을 정하면서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쉽게 내릴 수 있어 좋았어요. 앞으로 내 기술과 연구가 이런 식으로 연결되고 구현되겠구나 하는 큰 그림도 그릴 수 있고요. 급여나 복지, 연구 인프라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죠. 반대로, 이러한 장점에 맞물려 업무 주도성이 많이 낮아진다는 아쉬운 점도 분명 존재해요.
그런 아쉬움은 어떻게 해소하시고 있나요?
회사마다 문화나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저희는 정규 업무 시간 중 일부를 도전적인 과제 수행에 할애할 수 있도록 해요. 당연히 주 업무는 아니지만, 사이드 프로젝트 성격으로 새로운 일을 탐구하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팀을 꾸려 신규 과제를 수행할 수도 있죠. 또 여러 회의에 참관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제안해 업무를 만들기도 하고요. 회사 밖에서는 글을 쓰는 것으로 해소하고 있어요. 글쓰기의 좋은 점은 여러 가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내가 주도하는 프로젝트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단편적인 지식 한 조각을 읽었을 때 그것을 이해했다고 느끼긴 쉽지만, 그게 정말 자기 것이 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것을 둘러싼 여러 정보들이 마치 그물망처럼 연결돼 서로 지탱할 때 비로소 값어치 있는 내 지식이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예요.
개인적인 글쓰기는 언제 시작했나요?
2년 전쯤이요. 대학원 졸업 기준을 조금 빨리 채워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어요. 그때 논문이나 여러 콘텐츠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 하나가 《네이처》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였죠. 처음엔 제 인접 분야 소식을 알고 싶어서 구독했는데, 한창 코로나19가 확산할 때라 관련 콘텐츠를 읽으며 저도 공부가 많이 됐어요. 다만 뉴스레터는 읽고 나면 내용이 금방 휘발돼 아쉽더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재미있게 읽은 내용들을 아카이브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노션이나 에버노트 같은 툴에 스크랩 해두는 정도였는데, 하나둘 모일수록 콘텐츠 사이의 연결고리가 보이더라고요. 기사 몇 편을 큐레이션 해 3,000자 정도로 정리하니 꽤 만족스러운 글이 나왔죠.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글쓰기를 꾸준히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글을 쓰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점을 꼽아 본다면?
사람마다 글쓰기의 목적이나 목표는 다르겠지만, 저는 다양한 주제를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새로운 개념이나 기술들을 접할 때 전공자 수준의 지식이 없으면 ‘이건 왜 이런 거지?’,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등의 질문들이 생기는데 글을 쓰면서 이해하게 되고, 더 내 것이 되는 것 같거든요. 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정리해볼 수 있다는 점도 굉장히 좋아요. 얼마 전에 행동과학자 닉 채터가 쓴 《생각한다는 착각》을 읽었는데, 내가 잘 모르는 영역에서 메타인지가 얼마나 깨지는지 새삼 깨달았어요. 기사나 글 한 편을 읽고 ‘아~ 이런 얘기구나, 이제 알겠다.’싶다가 누군가에게 설명해 보려고 하면 잘 기억나지 않는 경험 다들 있으시잖아요? 자료를 모아 글로 정리를 하다 보면 ‘아, 내가 이 부분은 정확히 몰랐는데 그냥 건너뛰었구나’ 싶은 부분들이 다시 보이더라고요. 단편적인 지식 한 조각을 읽었을 때 그것을 이해했다고 느끼긴 쉽지만, 그게 정말 자기 것이 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것을 둘러싼 여러 정보들이 마치 그물망처럼 연결이 돼 서로 지탱할 때 비로소 값어치 있는 내 지식이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예요.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기가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 마감 기준을 정해두고 있어요. 아무리 못해도 열흘에 한 편은 쓰자 이런 식으로요. 그런 장치 없이 ‘그래, 글쓰기 좋지. 얼른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면 시작도 안 하고 한도 끝도 없이 미루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일부러 마감 기한이 있는 연재처를 구해 글을 썼던 적도 있어요. 사실 시간 관리의 문제인데, 결국 그건 내가 얼마나 글을 쓰고 싶은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갈 시간, 데이트할 시간, 운동할 시간 등등 내 시간 중 일부를 빼서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지속하기도 어렵고요.
평소에 어떤 자료를 보면서 글쓰기를 준비하는지도 궁금해요.
《네이처》나 《사이언스》 기사 외에 전문 학회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들도 챙겨 봐요. 영국 왕립학회나 미국 화학회, 물리학회 같은 곳들이요. 최소한 관련 학부 졸업생 정도의 지식 수준을 갖춘 사람이 타깃이다 보니 대체적으로 어려운 내용이 많지만, 가끔 ‘이건 좀 더 정리하고 다듬으면 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겠다’ 싶은 재료를 발견할 때가 있거든요. 과학, 수학 분야 온라인 매체인 콴타 매거진도 굉장히 즐겨 읽어요. 여기는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최신 연구를 다루는 곳이라 정말 어려운데, 그만큼 자극이 되는 글이 많이 있죠. 또 출퇴근 할 때는 영미권 팟캐스트를 주로 들으며 자료를 모으는 편이고요. 그렇게 글쓰기 재료를 모으다 관심이 더 쏠리고 연결 포인트가 보이는 주제가 생기면 글쓰기를 시작해요.
주로 해외 자료를 많이 보고 참고하는 편이네요?
네. 교과서에 실린 내용 보다는 좀 더 최신의 것에 가까운, 특히 아직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지식 정보를 전달하고 싶거든요.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실제 연구 일선이나 관련 업계에서 굉장히 활발하게 논의되는 주제들이 궁금하고, 그걸 가장 먼저 쉽고 재미있게 알고 싶은 분들은 제 글을 보시길 추천해요. 제가 쓰는 글의 방향이자, 차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최신 과학 정보 기대할게요.
앞으로도 글쓰기는 계속 할 생각이에요 글을 쓰는 행위 자체도 좋지만,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보통 출퇴근 시간이 꽤 길잖아요. 그냥 멍하니 있거나 핸드폰만 들여다 보는 게 시간 아깝고,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해서 시작했던 게 지금의 글쓰기로 연결된 것 같아요. 제 글쓰기는 일, 취미, 자기개발 등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요. 그래서 꾸준히 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