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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어요” Fig.1 저자 인터뷰

Fig.1이라는 필명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요.
논문에 넣는 시각 자료(그림)를 Figure라고 부르고 보통 ‘Fig.숫자’의 형태로 표기해요. 첫 번째 자료를 Fig.1이라고 적는 방식인데 여기서 따왔어요. 우리 주변에 있는 전자 제품이나 기술들의 처음과 그 역사를 글로 쓰고 있습니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개인적으로 물건을 살 때도 영향을 받는데요, 예를 들어 지금 입고 있는 맨투맨 티셔츠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맨투맨을 만든 브랜드의 옷이에요.
제품과 기술의 역사를 글로 쓰게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2019년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한 공모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과거의 연필을 재현해 제품화하고, 연필의 역사를 설명한 엽서를 같이 만들어 판매한다는 아이디어로 대상을 탔죠. 공모전을 함께 준비했던 디자이너 친구와 프로젝트를 계속 하기로 했지만 그 이후에 흐지부지 됐어요. 혼자 글이라도 모아두자는 마음에 다시 시작했는데 왠지 계속 미루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강제성이 좀 있어야 하겠다 싶어 작년 봄, 뉴스레터를 시작했어요. 개인적으로 사소한 것들의 역사를 아는 건 관심사를 늘리는 소확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맨투맨 하나도 전혀 다르게 보이니까요.
원래부터 글을 잘 쓰셨나 봐요.
지금 스타트업에서 에디터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글쓰기를 즐긴다기 보다 어려워 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거부감이 없는 거죠. 지금 회사도 기획자로 입사했다가 에디터로 직무가 바뀐 거에요.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을 이중전공했는데, 그때 글 읽는 연습을 한 것 같아요. 대학원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면서 실제로 글 쓰는 일이 많아졌고요.
생명공학에서 미디어 아트는 왠지 연결이 잘 안 되는데요?
예전에 록 페스티벌을 갔다가 케미컬 브라더스라는 영국 밴드를 봤어요. 세계적으로 이 밴드는 무대 장치가 화려한 걸로 진짜 유명하거든요. 무대 뒤의 영상 같은 거요.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압도당해 ‘나도 저런 거 한번 해보고 싶다’ 생각하게 됐죠. 그때부터 스크린에 들어가는 영상을 믹싱해 비주얼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브이제잉(VJing)을 배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커지게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에디터 일을 하면서 연재를 하고 계시다니 신기하네요.
대학원에서 조교였던 터라 논문을 많이 써야 했어요. 당시에 라이트 아트(Light art), 그러니까 빛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역사적으로 빛이 예술 분야에서 어떻게 활용됐는지, 현재 트렌드는 무엇인지, 내 작품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글로 써낼 일이 많았죠. 백열 전구로 층수를 나타내는 과거의 엘리베이터를 재현한 졸업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어떤 기술이든 잊혀지고 사라진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콘텐츠 주제를 전자제품과 기술로 한정하고 있어요. 언젠가 다시 전공을 살려 작품 활동을 할 때 충분히 접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물론, 지금은 에디터의 삶으로 거의 무게가 기울어져 있지만요. (웃음)
에디터로서 어려운 점은 없으신가요?
새로운 정보를 계속 좇고 가공하는 과정을 좋아해 일 자체는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다만, 업무를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에디터라는 직무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거에요. 회사 내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 사이드 프로젝트 성격의 파이퍼나 뉴스레터가 좋은 것 같아요.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말 자체가 퇴색된 지 오래라 쓰긴 싫지만, 뭔가 나로서 인정받는 느낌이 확실히 있으니까요.
일터에서의 갈증을 다시 글쓰기로 해소하는 셈이네요.
일로 글쓰기를 할 때는 뭐랄까, 나로서 존재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쓰는 글들은 아무래도 정말로 내 콘텐츠라는 느낌이 강해요. 텍스트는 아무래도 가장 먼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 멀티 유즈(Multi-use)라는 말처럼 오디오나 비디오 등 다른 유형으로 확장하기도 쉽고요. 앞서도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소재를 차곡차곡 모아둔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개인적인 아카이브 같은 거예요.
Fig.1 저자
“타깃을 따로 정해두진 않았어요. 그냥 제가 궁금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쓸 뿐이거든요. 제가 쓴 글의 진짜 타깃은 어쩌면 제 자신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본인 콘텐츠를 어떻게 읽어 주길 바라나요?
사실 출처를 많이 신경 쓰는 편이에요. 적어도 제 글을 봤을 때 나무위키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흔히 말하는 타깃을 따로 정해두진 않았어요. 그냥 제가 궁금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쓸 뿐이거든요. 주제와 키워드를 선정하고 막상 글을 쓰다 보면 ‘이거 너무 재미없는데?’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럼 과감하게 버리기도 합니다. 제가 쓴 글의 진짜 타깃은 어쩌면 제 자신인 것 같아요.
그래도 남들이 많이 봐줘야 좋은 거 아닌가요?
관련해서 이야기거리가 좀 있는데, 사실 최근에 좀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어요. (웃음) 유튜브를 시작했거든요. 뉴스레터와 달리 유튜브는 구독자 수에 엄청 연연하게 되더라고요. 뭔가 더 재미있게 해야 하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죠. 심지어 그런 고민을 하던 시점에 알고리즘 은혜로 영상 하나가 터졌어요. 복어 식용의 역사에 관한 영상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제가 전자제품, 기술 분야만 다루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거든요. ‘역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음식인가?’, ‘앞으로 이런 영상을 더 만들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결국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걸로 유명해지고 나서 뭘 하고 싶은데?’ 결국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로 다시 마음 먹었죠.
좋아해서 글을 쓰다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사를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네, 그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것 같아요. 사실 가까운 미래에 그런 결과물이 실제로 나왔으면 해서 제가 지금 하는 활동들을 합쳐 보려는 시도도 하고 있어요. 작게 전시를 열고, 작품의 주제나 소재를 제가 썼던 글 중에서 가져오는 식인 거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글쓰기를 다양한 곳에 버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쓰기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더 잘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겠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글쓰기 모임도 운영하고 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요. 사람들과 만나고 친해지는 데 글쓰기가 굉장히 좋은 도구거든요. 글을 쓰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가끔 “글을 써본 적이 없는데 참여해도 되나요?”라고 묻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럴 때마다 말씀드려요. 아무런 상관 없다고. 글쓰기를 하면 복잡했던 생각이나 자료를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돼요. 저도 글쓰기를 안 할 때는 여러 정보를 머릿속에 짐처럼 계속 갖고 있었어요. 정작 궁금하거나 필요할 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요. ‘이거 저번에도 궁금해서 찾아 봤던 건데 기억 못하고 있었구나.’ 아쉬워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글로 정리해 두면 그럴 일은 없더라고요.
 Fig.1 저자가 쓴 파이퍼 읽기